[드라마] 덧 씌우지 않은 연기, 그 아름다움

<선덕여왕>에서 이요원의 연기를 보면...참...연기를 못한다 잘한다를 떠나서 자신만의 연기가 거의 실종되어 버린 것 같다. 압도적인 연기력을 가진, 혹은 하나의 정형으로 남아있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 앞에서 상대역을 맡은 배우는 자신의 연기가 그에게 휩쓸려가지 않게 페이스 조절하는 게 참으로 중요한 것 같다는. 

49화에서 비담에게 진흥대제의 교지를 찾아오라고 했을 때 이요원의 어색한 대사 처리는 특히 잊혀지지 않는다. 미실 역을 맡은 고현정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구현한, 그 끊어지듯 이어지며 쉴새업이 변주에 변주를 거듭하는 독특한 발음에 이요원이 많이 감복받은 듯. 그래서 덕만이 공주의 자리를 되찾은 이후 이요원은 계속 고현정의 대사 처리를 흉내내는데, original 앞에서 따라해봤자 오히려 어색함만 더 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. 그저 끊어읽는다라는 느낌밖에 안 들어서 영 듣기 어색하다. 재는 한국말이 서투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;; 이요원이 미스캐스팅이라기 보다는...고현정이 너무 뛰어났다고밖에.

예전에 <아일랜드>를 보면서 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. 인정옥 작가의 전작 <네 멋대로 해라>에서 이나영의 연기는 <아일랜드>에서도 그대로 였는데, 작가가 절대적인 신임을 보여준 이나영의 연기-정확히는 눈짓과 표정 그리고 대사 처리-를 다른 배우들이 지나치게 의식했던 것이었을까? 이나영을 비롯한 4명의 주인공들, 현빈, 김민준, 김민정의 연기가 모두 똑같아서, 서로 다른 이나영 4명이 모인 줄 알았다. 덕분에 드라마 참 지겹게 봤던 기억이...;;;

여하튼, 우리 나라 드라마 그리고 영화에서도 좀체 보기 힘든 그 독특한 억양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니, 그게 참으로 아쉽다. 범작에 불과했던 <악마가 프라다를 입는다>가 대박을 친 이유가 메릴 스트립의 돋보인 연기 덕분이었고, 이는 그녀가 캐릭터에 맞추어 완벽히 control했던 그 발음에 있었듯이, 억양까지도 역에 맞춰서 통제하기란 사실 누구나 가능한 쉬운 일이 결코 아닌 듯 하다. 고현정은 이번에 그걸 해낸 것 같고, 그래서 자신이 맡은 역에 자신의 색을 입히는 것이 아니라, 캐릭터 그 자체가 되어버린 경지에 다다른  모습을 보여주었다. 

물론 연기라는 것이 전자제품 개발되는 것처럼 늘상 진보만 하는 게 아니고, 또한 이번 '미실' 역은 드라마 작가의 역량도 무시 못하기 때문에, 고현정이 이후에도 이와 같은 '경지'를 보여줄 지는 지켜볼 일이지만. 그러나 드라마 방영되기 전 '악역'을 맡은다기에 난 또 <해신>에서 채시라가, <신돈>에서 김해리가 정형화 했던 그 '악녀' 이미지의 재탕이려니 했는데 그와는 또다른, 아예 처음보는 캐릭터 설정을 해 낸 고현정은 역시 대단하고밖에.

배우는 참 아름다운 존재라고 생각하는데, 그 중에서도 이렇게 변화무쌍한 배우를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. 12월에 개봉한다는 <여배우들>을 기다리면서 이 아쉬움을 달래야지. 

by 이덧 | 2009/11/12 03:30 | 이덧의 끌적임 | 트랙백 | 덧글(1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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